어린시절 추억 담은 도시 변두리
산업화 뒷그늘을 섬세하게 그려내
거울 보는 마음으로 노트 접고
스물아홉 살에 떠난 영원한 청춘
도시 변두리에서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의 가슴을 절제된 언어로 그려냈던 시인. 산업화가 급속하게 진행되던 도시의 뒷골목에서 안개 낀 하천을 걸었던 시인 기형도를 기념하는 문학관은 경기도 광명시 KTX역 인근에 자리잡고 있었다.
예술적 감각이 돋보이는 현대식 콘크리트 건물로 지은 기형도문학관. 옆 마당에 세워진 안내판에 적혀있는 시인의 대표작 '빈집'이 적혀 있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이/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과연 시인은 자신의 마침표가 그토록 짧을 것을 미리 예감이라고 한 것일까. 문학관 안쪽으로 들어가면 시인이 살다간 발자취를 보여주는 연보가 걸려 있다. 1960년 경기도 연평도에서 태어난 시인 기형도. 면사무소 공무원으로 일하던 아버지가 간척사업에 실패하는 바람에 다섯 살 때 광명시로 이사한다. 이후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지는 불운이 겹치자 어머니가 시장에 나가 채소장사를 하는 등 가난하게 어린시절을 보낸다. 그 무렵 시인의 정서를 담은 작품이 바로 중학교 교과서에 실린 '엄마 걱정'이라고 한다.
"열무 삼십단을 이고/ 시장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지 오래/ 나는 찬바람처럼 방에 잠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하지만 시인의 아픔을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따르던 누이마저 열세 살 때 불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때 받은 충격으로 시인은 다니던 교회마저 발걸음을 끊었다고 했다. 훗날 시인은 그렇게 떠난 누이의 가슴을 이렇게 위로했다.
"누이여/ 이파리 하나 띄우지 못한 너의 생애를.../ 소리 없이 껶여갔던 그 투명한 기억을 향하여 봄이 왔구나/ 나리 나리 개나리 두드릴 곳 하나 없는 거리/ 봄은 또다시 접혔던 꽃술을 펴고"
그런 아픔 속에서 시인은 광명시를 가로지르는 안양천을 걸으며 사춘기를 보냈다. 산업화와 더불어 고도성장을 이루었던, 1970년대를 걷던 시인의 안양천은 인근 공장 굴뚝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로 가득했다. 그렇게 안양천을 흐르던 연기를 시인은 '안개'라고 불렀다. 1985년, 시인 기형도라는 이름 석 자를 처음 세상에 알린 데뷔작 '안개'도 바로 이런 기억을 끄집어 낸 작품이었다.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안개는 그 읍의 명물이다/ 누구나 조금씩 안개의 주식을 가지고 있다/ 여공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
이처럼 시인의 감성을 옥죄었던 사회분위기도 오래가진 못했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군사정권이 무너지면서 시인의 가슴에 드리워졌던 '안개'도 차츰 걷혀 나가기 시작했다.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불어 닥친 '민주화 바람'을 타고 문단에서도 순수시와 참여시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패를 갈려 주도권 다툼을 벌였지만, 시인 기형도는 그 어느 편에도 가담하기를 거부했다. 거울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지난 날을 되돌아보면서 다가올 앞날을 준비하려던 시인.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마른 나무에서 연거푸 물방울이 떨어지고/ 나는 천천히 노트를 덮는다"
그렇게 새로운 희망을 노래하고 싶어 했던 시인이었지만 그에게 남겨진 시간은 너무나 짧았다. 1989년 3월 7일 새벽. 새로운 시직을 준비하던 시인 기형도는 스물아홉 살, 젋은 나이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뇌일혈.
너무 빨리 마침표를 찍어버린 시인 기형도. 하지만 그가 남긴 시구절은 영원히 젊음을 살고 있다.
해맑은 얼굴에 주름도 없이.
[출처] 김해뉴스 정순형 기자 junsh@gimhae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