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절한 기형도(寄亨度·1960~1989)는 놀랍도록 아름답고 비극적인 시를 쓴 시인이다. 문학평론가 김현이 기형도의 시에 대해 "누가 기형도를 따라 다시 그 길을 갈까 봐 두렵다"고 말했으나 기형도가 그린 텍스트화된 세계 안에 많은 이가 기꺼이 매혹되고 헤맨다.
시인이 쓴 시와 시인의 삶을 동일시하기는 어렵다. '내 무시무시한 생애는/ 얼마나 매력적인가'(<흔해빠진 독서>)라는 시인의 생전 반문(反問) 이전에 그는 성실한 직장인, 착한 아들, 정이 많은 삼촌·동생이었다.
기형도는 1985년 《문학사상》12월호에는 시 <어느 푸른 저녁>의 시작(詩作) 메모를 실었는데 시인은 비트겐슈타인의 문장을 인용한다.
<... 비트켄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내 책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이 책에 씌어진 부분과 씌어지지 않은 부분이 그것이다. 그리고 정말 중요한 부분은 바로 이 두 번째 부분이다. …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은 거의 필연적이며 이러한 불행한 쾌락들이 끊임없이 시를 괴롭힌다. …>
내년이면 시인이 우리 곁을 떠난 지 30년이 된다. 30년간 지속된 그의 죽음과 사후적 텍스트 해석을 둘러싼 이야기들은 기형도를 우상과 신화적 존재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만약 시인이 살아 돌아온다면 이런 현실에 어떤 반응을 보일까. 생전 비트겐슈타인을 빌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해야 한다'고한 그였으니 말이다.
기형도는 어느덧 '말할 수 없는' 신화의 영역이 되고 말았다. 작년 11월 시인이 마지막까지 살았던 동네(경기도 광명시 소하동 701-6) 주변에 기형도문학관이 세워진 것도 신화의 한 영역이다. 전국에서 많은 이가 이곳을 찾고 있다. 그의 시를, 죽음을 탐닉하기 위해서일까, 기자도 3번 찾았다.
그곳에서 시인의 큰누나인 기향도(奇香度·65)씨를 만났다. 그는 기형도문학관의 명예관장으로 문학관을 찾는 이들에게 동생의 시와 삶을 들려주고 있다.
"기형도문학관은 동생이 쓴 시 <빈집>처럼, 여백이 많아요. <빈집>에서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잘 있거라'라고 하지 않았나요? 우리가 살면서 비워야 하는데 비우기가 얼마나 힘이 드나요? 이 '빈집'을 방문객들이 채워 가면 좋겠어요. 그런 의미에서 문학관은 '빈집'입니다. '빈집'은 시공간을 초월한 영원한 곳이자 자연의 일부예요. 시 <밤눈>의 시작메모에서 (기)형도는 '삶과 존재에 지칠 때 그 지친 것들을 구원해 줄 수 있는 비유는 자연(自然)'이라고 했잖아요. '빈집'은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말을 들려줍니다. 이곳을 찾는 모든 분들이 저는 시인이라 생각해요."
"기형도문학관은 '빈집'이자 '자연"
기형도는 1960년 3월 13일(음력 2월 16일) 경기도 옹진군 연평리 392번지에서 기우면·장옥순의 막내로 태어났다. 행정구역이 지금은 인천시 옹진군 연평면으로 바뀌었다. 원래 그의 부친 기우민의 고향은 연평도를 마주보는 황해도 벽성군이다. 6·25가 터지는 바람에 연평도로 건너왔다.
그러다 1964년 9월 경기도 시흥군 소하리(당시는 시흥군 일직리로 불렀다. 지금의 광명시 소화동이다)로 이주했다. 주변엔 안양천이 흐르고 넓은 논밭이 있으며 기아자동차의 소하리공장이 있었다. 적지 않은 마을 주민들이 기아차에 근무했다고 한다. 현재 기하대교사거리에서 KTX 광명역 방향의 안양천 뚝방길에 시인 기형도가 살았던 집터가 있다. 옛집은 허물어졌고 집터만 남아 있다.
학창 시절, 시인은 안양천을 따라 학교를 다녔다. 당시 소하리는 급속한 산업화에 밀린 철거민과 수재민들의 정착지였다고 한다. 처음 이주할 때는 방 두 칸짜리 기와집에서 살았으나, 그가 아홉 살 무렵 아버지 손으로 새 집을 지었다.
집에서 조금 걸어가면 버스 388번의 종점이었다고 한다. 시인은 <388번 종점>이란 시를 남겼는데 이 시는 유고시집 《입 속의 검은 잎》(문학과지성사)과 《기형도전집》(문학과지성사)에 실리지 않았다. 미발표 시가 실린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솔출판사)에 실려 있다.
구겨진 불빛을 펴며/막차는 떠났다.//
적막(寂寞)으로 무성해진 가슴 한켠 공지(空地)에서/
캄캄하게 울고 있는 몇 점 불씨/가만히/
그 스위치를 끄고 있는 한 사내의 쓸쓸한 손놀림
-<388번 종점> 전문.

기자는 시인의 큰누나 기향도와 함께 지금은 창고가 돼 버린 옛 집터를 거닐었다. 그리고 안양천과 388번 종점 부근을 둘러보았다. 안양천에는 지금도 철거민·수재민의 흔적이 남아 있다. 서울 여의도 등지에 살던 사람들이 도시 개발로 이주하면서 집단 하우스촌이 형성됐는데 이 마을을 '데부뚝마을'로 부른다. 이 데부뚝마을 부근에 시 <엄마 걱정>에 나오는 열무밭 자리가 있다. 기형도의 옛집과도 가깝다.
열무 삼십 단 이고/ 시장에 가신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 간 창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 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 <엄마 걱정> 전문.
시인의 큰누나 기향도의 말이다. "집터와 돼지 치던 돼지막 자리는 확실한데, 정확한 위치는 옛 우물터, 은행나무 위치와 비교해 봐야겠어요. 그땐 윗집 사람들이 우리 집에 매일 물을 기르러 왔어요. 물 펌프가 있었거든요. 저쪽(안양촌 뚝방길을 가리키며)으로 가면 <엄마 걱정>에 나오는 열무밭 자리가 나와요, 지금도 그대로 있어요. 안양천은 당시 물이 깨끗해서 여름에는 멱 감고 겨울에는 스케이트를 탔는데 공장이 들어서면서 오염이 됐어요. <안개>도 그렇게 쓰였어요. 지금은 다시 깨끗해져서 물고기가 살더라고요."
시인의 옛 집터 주변은 광명의 새로운 상권으로 변신
시 <안개>는 1985년 《동아일보》신춘문예에 당선된 작품이다. 시인은 집 근처 광명 서면초등학교 대신 지벵서 4km 떨어진 시흥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안양천 뚝방을 걸어 등하교를 했다. 안양천 뚝방길을 배경으로 쓴 <안개>는 3부로 나뉘어 있다. 1부는 1연 1행의 서(序), 2부는 6연, 3부는 1연 5행으로 구성돼 있다. 1,3부는 안개 낀 정경, 2부는 안개에 마비돼 무감각해지는 인간들의 비정함을 노래한다.
이 읍에 와본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한다./ 앞서간 일행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쓸쓸한 가축들처럼 그들은/ 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
안개가 걷히고 정오 가까이/ 공장의 검은 굴뚝들은 일제히 하늘을 향해/ 젖은 총신(銃身)을 겨눈다. 상처 입은 몇몇 사내들은/ 험악한 욕설들 해대며 이 폐수의 고장을 떠나갔지만/ 재빨리 사람들의 기억에서 밀려났다. 그 누구도/ 다시 읍으로 돌아온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아침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안개는 그 읍의 명물이다./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 여공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
-<안개> 2부 1연과 6연, 3부 1연 전문.
실제로 안양천 뚝방길엔 자주 안개가 끼었다고 한다. 인근 공장에 다니는 노동자가 많았는데 대개는 회색빛, 카키색 작업복을 입고 출근했다. 기향도의 말이다. "지금은 기아차지만 (기)형도가 어린 시절에는 기아산업으로 불렀어요. 소하리공장은 1973년 이곳에 들어섰는데 그때만 해도 주변엔 허허벌판 논밭이 대부분이었죠." 지역 주민들은 "기아차 소하리공장이 기아차의 모태"라고 말한다. 그러니깐 기아차가 본격적으로 자동차 생산에 뛰어든 시점이 소하리공장이 준공된 이후로 볼 수 있다. 현재 기차아 소하리공장은 화성공장과 함께 기아자동차의 3대 국내 공장 중 하나로 커졌다. 대지 연먼 0.76㎢, 연건평 0.40㎢에, 근무 인원은 6200명(2010년 기준)에 달한다. 계속된 그의 말이다. "안양천으 끼고 이 동네의 역사를 제가 다 알잖아요. 그 시절엔 똥지게를 져야 했잖아요. 집아늬 맏딸인 제가 그 일을 했어요. 떄론 하기 싫어 늦게 하교한 적도 있어요.(웃음) 시(광명)에서 안양천과 (기)형도 옛 집터를 배경으로 인문학 벨트까지 구상하고 있는데 이미 주변이 몰라보게 달라졌어요. 이케아 광명점, 롯데아울렛이 들어섰고 앞으로 중앙대병원도 온대요. 그 앞에 코스트코 광명점이 있고 그 뒤가 KTX광명역입니다. 또 공사 중인 애경백화점, 카사미아호텔이 완공되면 광명의 새로운 상권으로 이곳이 탈바꿈할 거예요. 그 곁에 있는 기형도문학관은 양기대 전 광명시장이 배려한 점이 크지만 무엇보다 지역 주민들이 '집'을 지어 주셨어요. 내녀이면 (기)형도의 30주기가 되는데 죽은 이를 살려서 이 집을 지어 주시니 감사하지요."
'위험한 가계' 이야기
시인의 유년 시절은 가난했다. 아버지(기우민)는 마을 개발에 앞장서고 성실하게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열 살 무렵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지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기향도의 말이다. "몸이 불편하셨는데도 아버지는 성격이 깔끔하셨죠. 집 울타리 아래에 채송화도 심고 매일 마당을 쓰쎴죠. 하루도 거르지 않으시고...(기)형도도 그렇지만 아버지의 글씨체가 좋았어요. 형도가 쓰던 공책이 있는데, 글씨를 정성 들여 썼어요.
- 태몽이나 태어날 때 특이점이 있었나요.
"어머니(장옥순) 말씀이 연평도에서 동생이 태어나던 날, 몸에 태기가 있었는데 나무하러 산에 가셨대요. 솔잎이나 솔가지를 거둬 불을 때던 시절이었어요. 힘들게 나무를 해 오자마자 바로 형도를 낳은겁니다. 잘 먹지 못해 키만 크고 가죽이 뼐에 붙었었다고 해요. 어머니가 젊은 나이에 가장 역할을 할 수밖에 없어 밤일을 나가신 적이 많았어요. 그럼 제가 어머니를 대신해 동생들을 보살펴야 했죠. 어머니가 없는 컴컴한 방에 겨울 추위는 얼마나 매섭던지... 아랫목에 막내인 (기)형도를 먼저 누이고 그 다음에 어린 순으로 동생들을 누이고 잠을 잤어요. 저는 맏딸이니 윗목에 자리할 수밖에 없었어요. 추우니까 발도 못 펴요. 그때 제 나이가 초등학교 2,3학년 됐을라나?...이불도 성치 않아 새우잠을 자야 했던 기억이 납니다. 아버지가 쓰러지신 뒤 어머니가 고생하시고, 저와 다른 누이들이 고생한 것을 형도는 묵묵히 지켜본거이죠. 저는 월급 타면 고스란히 어머니께 갖다드렸어요. 10원짜리 동전까지 모두 드렸어요. 그 시절을 그렇게 살았어요." 시인이 쓴 <위험한 가계·1969>엔 이런 표현이 나온다, 1969는 '1969년'을 가리키는데, 아버지 기우민이 중풍으로 쓰러진 해이다.
그해 늦봄 아버지는 유리병 속에서 알약이 쏟아지듯 힘없이 쓰러지셨다. 여름 내내 그는 죽만 먹었다. 올해엔 김장을 조금 덜해도 되겠구나. 어머니는 남폿불 아래에서 수건을 쓰시면서 말했다. 이젠 그 얘긴 그만하세요 어머니. 쌓아 둔 이불에 등을 기댄 채 큰누이가 소리 질렀다. (중략) 봄이 오면 아버지도 나으실 거구. 풍병(風病)에 좋다는 약은 다 써 보았잖아요. 마늘을 까던 작은누이가 눈을 비비며 중얼거렸지만 어머니는 잠자코 이마 위로 흘러내리는 수건을 가만히 고쳐 매셨다. (중략) 가을밤의 어둠 속에서 큰누이는 냉이꽃처럼 가늘게 휘청거리며 걸어왔다. 이번 달은 공장에서 야근 수당까지 받았어. 초록색 추리닝 윗도리를 하나 사고 싶은데. 요새 친구들이 많이 입구 출근해. 나는 오징어가 먹고 싶어. 그건 오래 씹을 수 있고 맛도 좋으니까. 집으로 가는 길은 너무 멀었다. 누이의 도시락 가방 속에서 스푼이 자꾸만 음악 소리를 냈다. 추리닝이 문제겠니. 내년 봄엔 너도 야간 고등학교라도 가야 한다.
-<위험한 가계·1969>의 1부와 3부 중에서.
나이가 들어도 '엄마, 엄마' 하던 시인
시인은 큰누나 기향도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두 사람의 나이 차이는 7살. 기형도는 큰누나의 등에 업혀 한글을 꺠쳤다고 한다. "형도와 저는 7살 차이가 나요. 형도는 걷기 전에 말부터 했어요. 저도 말이 빠르지만 동생도 빨라요. 제가 앉은뱅이책상에 엎드려 공부를 하고 있으면 가만히 등 뒤로 다가와 제가 읽던 책을 보곤 했어요. 또 동생을 업고 숙제를 많이 했는데 거기서 걔가 한글을 깨쳤어요."
- '어깨너머로 배운다'는 말이 실현된 것이네요.
"맞아요. 그리고 동생이 예뻤어요. 친적분이 마을 구경가게를 했는데 동생을 업고 그곳엘 가곤했어요. 동생이 노래 부르고 재롱을 떨면 큰 알사탕을 주셨거든요. 사탕이 얼마나 큰지, 입이 다물 수 없을 정도였어요. 형도 덕분에 저도 얻어먹을 수 있어 좋았죠. 동네 여기저기서 '형도야, 노래해 봐라' 이런 분들이 많았어요."
기형도는 아버지를 대신해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어머니를 무척 걱정했다. 시인의 눈시울을 뜨겁게 한 '유년의 윗목'에느 어머니가 자리 잡고 있었다.
"참, 살뜰한 아이였어요. 밖에서 돌아오면, 어머니부터 찾아요. 안방, 부엌, 돼지막, 심지어 화장실까지 쫓아가서 어머니를 찾을 정도였어요. 나이가 들었는데도 '엄마, 엄마~'그러고... 어머니가 딸 셋을 낳고 막내 (기)형도를 낳았잖아요. 딸만 낳아서 너무 창피했는데 아들 낳아서 좋아했던.. 형도는 그런 아들이었어요. 그런 아들이 먼저 떠났으니 어머니가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형도가 어머니에게 조리기구나 소쿠리를 사 드린 적이 있어요. 길을 가다가도 이(예)쁘다 싶은 것이었으면 사다가 어머니꼐 드릴 정도로 자상했죠. 조카들에게도 마찬가지였어요. 얼마 전 만난 조카들 말이 '형도 삼촌이 돌아가시기 1주일 전에 만났다'는 거예요. 무슨 일이 있으면 조카들을 찾아가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다정하게 지냈나 봐요."
어머니 장옥순의 회고에 따르면, 막내 형도와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기형도 : "제가 쓴 글을 많은 사람들이 보았으면 좋겠어요."
어머니 : "얘야. 글 쓰는 사람은 가난하게 산단다."
기형도 : "저는 다른 일도 할 수 있어요. 만화를 그리거나 가수가 되면 좋겠어요. 저는 늙어서도 할 일이 많아요'"
- 연평도에 살 때, 아버지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6·25 직후 연평도로 건너왔는데, 아버지는 피란민들을 위해 죽을 쑤는 '우유죽 소장'이었어요. 미국이 원조한 탈지분유를 물에 타서 끓인 우유죽을 피란민에게 나눠주셨던 거죠. 커다란 솥에 우유죽을 끓였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유죽, 옥수수죽 담던 그릇도 생각이 나요. 그땐 그릇이 흔하지 않던 시절이었잖아요. 바가지에다 혹은 분유통보다 큰 깡통의 양 옆에 구멍을 뚫고 철사로 손잡이를 만들어 들고 다니던 시절이에요. 그 깡통에다 우유죽을 담았어요. 언젠가 어머니가 그러셨어요. 그 시절, 연평도에 산 사람 치고 '기 서기'를 모를 사람이 없을 거라고요."
- '기 서기'란 '기우면 면서기'의 줄임말이군요.
"네, 지금도 그때를 경험한 사람이면 아버지를 아실 거라고 어머니께서 말씀하셨어요. 아버지는 노래도 잘하셨어요. 형도 (노래) 실력은 아버지 영향을 받았나 봐요. 아버지는 술 한잔하실 때면 '죽장에 삿갓 쓰고 방랑 삼천리~'하는 <김삿갓 노래>를 부르셨죠. 제가 다 외워요. 저를 무플에 앉히시고 <번지없는 주막>도 불렀던 기억이 납니다. 아버지는 풍류를 아셨어요."
먼 등하굣길.. 다양한 장르 음악 좋아해

기형도 시인도 음악을 좋아했다. 기타를 치며 노래도 잘했지만 작사·작곡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연세문학회 문우인 소설가 성석제의 회고에 따르면 기형도는 <2인의 척탄병>이며 <에덴의 동산>이나 트윈 폴리오의 곡들을 좋아했다고 한다. <2인의 척탄병>은 하이네의 시에 슈만이 곡을 붙인가곡이다. '우리(기형도·성석제)는 버스에서 내린 다음 시장을 거쳐 학교 정문을 통과하고 백양로를 걸어 언덕에 있는 종합관에 이르기까지 그 노래를 불러댔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p229)
술자리에서 기형도가 자주 부르던 노래의 원주인은 송창식과 조용필, 가끔 조영남도 섞였고 그때그떄 유행하던 노래도 불렀다. 남들이 따라할까 봐 일부러 음정을 높게 잡았다가 공연히 핏대를 세우는 고생을 자주 했다고 한다. "주머니에 두 손을 넣고 허리를 약간 굽힌 채 눈을 감은 그는 시키면 주저없이 노래하고, 노래하고 노래했다"(성석제)는 것이다.
기형도문학관에는 시인이 즐겨 듣던 카세트테이프 몇 개가 전시돼 있다. 가요, 클래식, 국악, 합창곡 등 시인이 듣던 음악은 종횡무진이다. 편식이 없다.
(중략) 기향도의 말이다. "동생이 즐겨 듣던 미니 라디오와 이어폰을 솜으로 문질러 보면 시인의 DNA가 많이 나올 겁니다. 학창시절 등하굣길이나 출퇴근길이 아주 멀었으니 땀을 뻘뻘 흘리며 음악을 들었을 테니까요."
- 지금도 건전지를 넣으면 낡은 미니 라디오가 작동될까요.
"아마도, 아마도,,,"
- 즐겨 듣던 카세트테이프를 보니 국악에서 클래식, 트롯, 팝송까지 다양합니다. 무척 놀라워요.
"좋아하는 음악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면 녹음하곤 했어요. 음반이 귀한 시절이었으니까요. 아직도 어머니 집에는 동생이 좋아하던 들국화, 김정호가 부른 가요 등 여러 가수들의 테이프가 많아요. 학창시절, (기)형도의 제일 친한 친구가 (조)병준이었는데, 서로 집에 가서 자고 그랬어요. 형도 때문에 병준이가 연세문학괴 모임에 가끔 참석해 준회원처럼 지냈나 봐요. 형도가 죽자 병준이 어머님이 장례식장에 와서 많이 우셨다고 해요. 병준이 어머님이 학창시절, 형도 밥을 많이 해주셨거든요."

광명 소하동 집은 '그린 게이블즈'
유년 시절, 시인의 집 다락방에는 누나들이 읽던 책이 가득했다고 한다. 기형도는 특이하게도 걷기 전에 말을 시작했고, 노래도 갇잘 불렀다. "한글을 두세 살 때 깨쳤다'고 한다. 또 누이들과 함게 마을에 맞는 책을 들고 호박씨나 해바라기씨를 까먹으며 지냈다는 즈엉ㄴ도 있다. 광명 소하도 집을 《빨강머리앤》에 나오는 집 ‘그린 게일블즈’라고 부르곤 했다.
“형편이 안 좋아 많은 책을 살 수 없었지만 제가 문학전집이니 위인전 같은 전집을 사 주곤 했어요. 또 빌려다 보기도 했어요. 형도의 책꽂이에는 책이 많았어요. 형도는 무슨 책이 꽂혔는지 다 외우고 있었죠. 여기에 성격의 일단이 드러나는데 예를 들어 이념이나 문학적 지향점이 다른 출판사의 책들을 함께 꽂아 두지 않고 중간에 중도적인 출판사의 책들을 꽂아 두었다고 해요.”
그러니깐 ‘창작과비평’과 ‘문학과지성’ 사이에 ‘민음사’ 책들을 두었다는 말이군요.
“네, 맞아요. 저자, 출판사 간의 화해가 필요하다는 의미에서 그랬나 봐요. 한마디로 조화로운 성격의 소유자였어요.”
시인이 남긴 유품 중에 시·소설·철학·에세이 제목과 저자 이름을 앞뒤로 빽뺵이 자필로 쓴 문서가 있다. 모두 삼중당문고 목록이다. 기형도와 교우했던 소설가 장정일의 표현을 빌리자면, “한 권에 150원 했던 삼중당문고는 수업시간에 선생님 몰래, 두꺼운 교과서 사이에 끼워 읽을 수 있었을 만큼” 교복 주머니에 쏙 들어가던 책이었다. 시인은 값싼 삼중당문고를 읽으며 문학에 심취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다음은 그가 쓴 삼중당문고 목록이다. 일부만 소개한다.
<... 체호프 단편선-체호프, 서머싯 모옴 단편선-모옴, 사르트르 단편선-사르트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니체, 여자의 일생-모파상, 어린왕자/전시조종사-생텍쥐페리, 야간비행/남방우편기-생텍쥐페리,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O.와일드, 구토-사르트르, 호밀밭의 파수꾼-피츠제럴드, 델러웨이 부인-버지니아 울프, 젊은예술가의초상-제임스 조이스, 인간조건0앙드레 말로, 선택된 인간-토머스 만, 고리오 영감-발자크, 지와 사랑-헷세, 설국-가와바타 야스나리, 발레리 시선-발레리, 보들레르 시선-보들레르, 엘리엇 시편-엘리엇, 꽃의 소묘-김춘수, 청록집-박목월·박두진·조지훈, 아담, 그대는 어디에 있었느냐-하인리히 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괴테, 허공에 매달린 사나이-솔 벨로, 북호텔-외젠다비, 페스트-카뮈, 말테의 수기-릴케, 홀로 있는 시간을 위하여-김형석, 거부하는 몸짓으로 이 젊은을-이어령,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어령, 우수의 사냥꾼-이어령, 장군의 수염-이어령, 마테오네 집-송영, 날개-이상, 총독의 소리-최인푼, 삼포 가는 길-황석영, 병신과 머저리-이청준, 닳아지는 살들-이호철, 히포크라테스 흉상-신상웅, 즐거운 지옥-홍성원, 달-방영웅,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틀니-박완서, 인천비 서울비-천승세, 내걸린 얼굴-조선작, 들끓는 바다-백시종, 잠시 눕는 풀-김원일, 밀다원시대-김동리, 이 성숙한 밤의 포옹-서기원, 사반의 십자가-김동리, 일월-황순원, 인간접목-황순원, 밤에 쓴 인생론-박목월, 이상한 토요일-김문수, 내 마음은 돌이 아니다-이병주, 바보 연구-김주영...>
- 삼중당문고 리스트를 시인이 다 읽었을까요.
“글쎄요. 물어보지 않았지만 다 읽었거나 읽으려 했던 책들이 아닐까요?”
- 시인이 남긴 유품들로 어떤 게 더 있나요.
“동생이 독일어 공부를 열심히 했나 봐요. 독일어 공책과 시험지가 굉장히 많이 남아 있어요. 일부는 기형도문학관에 전시하고 있죠. 다른 공책들도 많아요. 공책을 펼쳐보면 글씨를 반듯하게 잘 쓰고 그림도 곧잘 그렸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어린 시절, 직접 만화를 몇 권 그려 동네 친구들이 돌려볼 정도였으니까요. 중1 때 쓰던 체육노트에는 11명의 선수들을 직접 그린 그림도 있어요. 아주 세밀하게 묘사를 했는데 (기)형도 친구가 축구에 대한 증언을 한 적이 있어요.”
- 축구도 잘했나 봐요.
“아뇨. 못했대요. (웃음) ‘형도는 축구를 하고 싶어해 끼워 주면, 40분이고 50분이고 열심히 뛰었대요. 그런데 막상 볼(공)이 오면 제대로 못 찼다’고 해요. 집에 일기장도 있어요. 너무 개인적인 것이어서 아직 공개를 안 했어요. 탁상시계도 있는데 우리 형제들이 쭉 써 온 것이지만 동생이 물려받아 가장 오래 썼어요. 그 시계에 얽힌 사연이 얼마나 많겠어요?”
기자는 ‘신림중 1학년 5반 52번 기형도’의 성적표를 보았다. 국어와 수학, 영어 점수가 뛰어났다. 만점에 가까웠다. 반면 체육은 1,2학기 통틀어 80점대였고 ‘반공 및 도덕’ 과목도 1학기 때 80점대였다. 1학년 말 학급 68명 중에서 1등, 전교 831명 중에서 1등을 차지했다. 담임교사가 쓴 통신란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활발하고 명랑하며 적극적임. 친구들이 좋아하고 있음.’
큰누나 기향도의 말이다.
“상장이나 임명장, 학급 반장 배지도 있어요. (기)형도가 버리지 않고 다 보관하던 것들이에요. 그런 면을 보면 성격이 치밀하고 꼼꼼했나 봐요. 어머니가 당신의 아들 유품을 라면박스에다 차곡차곡 담아 놨어요. (박스가) 비를 몇 번 맞았지만 그대로 남아 있어요. 어머니 입장에서 생각하면 공부시켜 놓은 자식이 먼저 갔으니 그냥 (유품을) 붙잡고 있었겠죠.”

‘이제는 그대가 모르는 이야기를 하지요’
- 동생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이 사람은 ‘사람’이었어요. 괜찮은 ‘사람’이었어요. 굉장히 살뜰하고 다정다감한 보통의 사람이었어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시인인지 동네 사람들은 전혀 몰랐어요. 알 수가 없었겠죠. 나서서 말하고 잘난 척하지 않았으니... 동생이 세상을 떠난 뒤 마을 분들이 그랬대요. ‘형도가 그런 사람이었어?’라고요. 평범한 청년인 줄만 알았던 것이죠. 낡은 구두를 신고, 담배는 폈지만 술은 못했어요. 한 잔만 마셔도 얼굴이 빨개질 걸요? 대신 받아 놓은 술잔을 앞에 두고 술취한 친구들과 잘 어울렸다고 해요. 동생이 입던 옷은 다 태웠는데 양복 한 벌만 남았어요. 어머니가 당신 돌아가실 때 함께 관 속에 넣으려고 했던 것인데 문학관에 걸려(전시돼) 있어요.”
- 시인이 남긴 많은 시들 중에 어떤 작품을 좋아하세요.
“저는 <정거장에서의 충고>라는 시를 좋아해요. 형도는 시집 제목을 <정거장에서의 충고>로 할지,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로 할지 고민하고 있었어요. 죽기 얼마 전 제게 보낸 편지에서 ‘<정거장에서의 충고>를 제목으로 정하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면서 제 의견을 물어 왔었어요. 이 사람(기형도)이 쓴 여러 시편들을 보고, 우리 집이 겪었던 일들을 돌아보면서 그가 말한 ‘충고’의 의미를 알게 됐어요. 시 <빈집>에서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와 <진눈깨비>에서 ‘나는 일생 몫의 경험을 다했다’고 말한 의미, 그리고 <정거장에서의 충고>에서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는 미완성 시 <내 인생의 중세>의 ‘이제는 그대가 모르는 이야기를 하지요’와 연결된다고 생각합니다.”
<내 인생의 중세>는 시인이 남 긴, 늘 들고 다니던 푸른 노트에 도입부만 써 놓은 시다. 도입부만으로 충분히 아름답다.
이제는 그대가 모르는 이야기를 하지요
너무 오래되어 어슴프레한 이야기
미루나무 숲을 통과하던 새벽을
맑은 연못에 몇 방울 푸른 잉크를 떨어뜨리고
들판에는 언제나 나를 기다리던 나그네가 있었지요.
생각이 많은 별들만 남아 있는 공중으로
올라가고 나무들은 얼마나 믿음직스럽던지
내 느린 걸을 때문에 몇 번이나 앞서가다 되돌아오던
착한 개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는 나그네의 깊은 눈동자를 바라보았지요.
미완성 시 <내 인생의 중세> 전문
내년이면 기형도가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된다. 그의 시는 많은 이를 위로하지만 그를 위로하며 추억하는 이들 역시 많다. 기형도문학관은 그의 시를 더 가까이 공감할 수 있는 공간이 될 것이 분명하다. 마찬가지로 기형도 시비평과 전지적 연구도 더 필요하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