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어느 여름날이었다. 유치찬란한 기자 칼럼을 쓰고 난 뒤에 한 독자로부터 이메일을 받았다. 메일에는 시 한 편이 적혀 있었다. 시의 맨 끝 문장이 머리에 쿵 하고 떨어졌다.
"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 검은 잎은 `혀`를 은유한 단어다. 혀가 놀면 말이 나오고, 그 말을 종이에 쓰면 글이 되는 법. 결국 그 독자가 내게 던진 메시지는 명료했다. `당신의 글은 마치 검게 병든 혀가 내뱉은 썩은 단어 같다`는 것이었고, `그 병든 혀가 당신 입에 악착같이 달려 있는 듯하다`는 거였다.
시의 제목은 `입 속의 검은 잎`. 다수 평론가들은 1980년대 권위주의 정권에 저항한 시로 해석했으나 2000년대에 그 글을 접한 나는 달리 받아들였다. 평론가들은 `검은 잎`을 독재 정권에 대한 타협과 굴복의 징후로 풀이했으나, 나는 썩은 언어를 내뱉게 하는 여러 요인들로 해석했다. 내 게으름과 순응은 그중 하나일 뿐이다.
그 시의 첫인상이 워낙 강렬해서인지 그날 이후 그 시를 쓴 시인 `기형도`라는 이름 석 자와 `검은 잎`이라는 시구 석 자는 내 기억을 관장하는 뇌세포를 한 움큼 움켜쥐고 놓지를 않았다. 때때로 그날을 기억하며 그의 시를 두려운 마음으로 읽었다. 썩은 글을 쓰지 않겠다는 다짐도 함께했다. 동시에 내게 기형도를 알게 해준 그 독자에게 진정 감사했다.
그 기형도를 기리는 문학관이 지난 10일 경기도 광명에서 문을 열었다는 소식이 들리자 문득 그의 삶이 참을 수 없이 궁금해졌다. 짧은 시 하나로 누군가의 머릿속을 뒤흔들어놓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자세히 알고 싶었다. 토요일 아침 차를 몰고 기형도문학관에 갔다.
그는 짧게 살았다. 1960년 2월에 태어나 1989년 3월에 사망했다. 심야극장에서 영화를 보던 그를 신(神)이 영원으로 데리고 갔다. 그는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자기 시에서 썼듯이 부친이 중풍으로 `유리병 속에서 알약이 쏟아지듯` 힘없이 쓰러진 탓이 컸다. 1층 벽에 적힌 그의 일생과 시를 읽으면서 실내를 한 바퀴 돌고 나니, 그의 지인들이 그를 기억하며 촬영한 동영상을 만났다. 그의 외조카인 한 언론인의 육성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1986년 아시안게임 때 삼촌이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였어요. 개막식을 보고 기사를 쓰는데 원고지 4~5장 썼겠죠. 그걸 밤새도록 써. 밤새도록 고쳐요. 그걸 작품으로 생각하더라고. 자기의 영혼이 담긴 작품 같은 거."
무릇 글, 특히 시를 쓰는 사람의 자세란 이런 것인가 보다. 기형도는 자신의 글이, 입 속의 검은 잎이 내뱉는 죽은 글이 되는 걸 죽기보다 싫어한 게 틀림없었다. 기형도처럼 좋은 시인은 밤새 고쳐 쓰기를 반복하며 몇 자에도 영혼을 담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짧은 시에도 영혼이 흔들리는 경험을 한다. 시인의 영혼과 조우하게 된다. 덕분에 우리의 정신은 더욱 깊어지고 넓어진다.
정신이 빈곤한 사회일수록 그 같은 시인의 자산을 모른다. 그저 눈에 번쩍 띄는 거대한 무언가로 스스로를 과시하려 든다. 바벨탑 같은 위압적인 거대 건물을 자랑으로 내세운다. 이는 내면의 빈곤을 숨기고자 하는 열등감의 산물처럼 느껴진다. �
賻� 정신이 풍요로운 사회는 다르다. 시인을 기념하는 곳이 중요한 상징이 된다. 시와 문학이 시민들 삶 속으로 들어오는 현장을 소중히 여긴다. 곳곳에 문학관을 짓고 시인의 생가를 복원하며 시인의 흔적 하나하나를 소중히 여긴다. 한국 사회는 이제 갓 시작일 뿐이다.
문학평론가 김현이 기형도의 유고 시집에 첨부했던 해설이 기억난다. "그의 시들을 접근이 쉬운 곳에 모아놓고, 그래서 그것을 읽고 그를 기억하게 한다면, 그의 육체는 사라졌어도, 그는 죽지 않을 수 있다. 그의 시가 충격하는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는 빨리 되살아나, 그의 육체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그의 육체를 상상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기형도문학관이 바로 그 같은 역할을 하기를 소망한다.
[김인수 오피니언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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